솔직히 저는 처음 노인복지센터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인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뭔가 거창한 법 조항이나 국제 협약 같은 것이 먼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인권은 어르신께 물 한 잔을 드릴 때 "어디에 놓아드릴까요?"라고 먼저 여쭤보는 것처럼, 아주 작은 일상의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인권의 보편성,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인권의 보편성(universality of human rights)이란, 나이·성별·국적·경제적 상황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권리를 가진다는 원칙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원칙은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UDHR,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도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UDHR이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국가가 함께 합의한 인권의 기준을 담은 선언으로, 지금도 국제 인권 논의의 출발점으로 작동합니다
([출처: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https://www.ohchr.org)).
그런데 제가 현장에서 만난 어르신들을 보면, 이 보편적 권리가 실제로 똑같이 주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 가족과 연락이 끊긴 어르신, 경제적으로 기초생활을 겨우 유지하시는 어르신. 같은 사람인데 처한 상황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고 나서야, 인권의 보편성이 선언에 그쳐선 안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은 사회적 약자(social vulnerable group)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적 약자란 신체적·경제적·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거나 보호받기 어려운 집단을 의미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분들은 본인이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이 정도는 참아야지"라며 말씀을 아끼시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계신 셈입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인권 보호가 중요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어르신은 신체적·경제적 이유로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 제도적 보호 없이는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하게 되어 서비스 질이 불균등해집니다.
- 인권은 타고난 천부권(natural rights)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박탈될 수 없습니다.
- 보편적 권리가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국가와 지역사회 차원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천부권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갖는 권리를 말하며, 누가 부여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어르신이 치매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권리를 줄여도 된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결정권과 사회적 보호, 둘 다 놓치면 안 됩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르신 댁에 방문했을 때 집안이 다소 지저분해 보이면, 어르신께 여쭤보기 전에 먼저 청소기를 꺼내 들려고 했습니다. "도움을 드리는 게 맞지 않나"라는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한 어르신이 "내 집인데 내가 알아서 해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걸 듣고 멈칫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선의가 반드시 존중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의 핵심입니다.
자기결정권이란 개인이 자신의 삶에 관한 사항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사회복지 실천 윤리에서는 이 자기결정권이 클라이언트(client), 즉 서비스를 이용하는 당사자의 가장 핵심적인 권리 중 하나로 강조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이론에서만 배워서는 몸에 잘 익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르신 앞에서 "제가 해드릴까요?" 대신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먼저 물어보는 습관이 생기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거나 행동이 느리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 한켠에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이 올라올 때, 그것을 누르고 기다리는 것이 사실은 인권을 지키는 행위라는 걸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에서도 클라이언트의 자기결정권 존중은 기본 원칙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사회복지사협회](https://www.welfare.net)).
그런데 자기결정권만 강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르신이 건강 악화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괜찮다"고 하신다면, 그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진정한 존중인지 판단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 보호 의무(duty of social protection)가 필요합니다.
사회적 보호 의무란 개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을 말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즉 자기결정권과 사회적 보호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르신의 의사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위에서 안전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맞는 순서라고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면 그게 결국 어르신의 존엄성을 건드리게 됩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노인 인권침해 사례 중 상당수가 신체적 학대보다 선택권 박탈이나 의사 무시 같은 심리적 침해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출처: 보건복지부](https://www.mohw.go.kr)).
인권을 지키는 책임을 사회복지사 개인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이 과정에서 강해졌습니다. 한 명의 담당자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서비스를 연계하려면 그만큼의 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건 개인의 열정으로만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인권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권리이지만,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지켜지도록 하는 건 결국 사람과 제도의 몫입니다.
앞으로 저는 어르신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삶과 의견을 가진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시각이 흔들릴 것 같을 때, 처음 그 어르신이 "내 집인데 내가 알아서 해요"라고 하시던 표정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 참고: 사회복지실천의 윤리와 윤리강령
